부모가 싫어 집을 나왔다 집이 싫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부모가 싫었다. 집을 떠나고 싶었다. 대체 왜 가출하면 안 되는 거지?
언제까지 이 집에 있어야 하는 거지?
내가 집을 나가면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등과 같은 근원적인 궁금증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생각은 많았는데 행동하기는 어려웠다. 지금 나가면 다가올 겨울은 어떻게 버티지?
그때까지 밖에서 살 수는 있을까?
잠은 어디서 자야 할까?
결국에는 돌아와야 하잖아?
열여섯 중학생에게 가출이란 막연하고 막막한 그런 것이었다. 아니다. 그때 나는 열다섯이었나. 당시 내 나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먼 옛날. 나는 그때부터 가출을 그렸다.
압박감과 모멸감을 느끼고 내 자존감이 추락하던 그날. 나는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오지 않으면 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집을 나오는 그날까지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가출을 그리고 계획했다.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이 집에서,이 세상에서. 하지만 못 해 본 게 너무 많은 나이였다. 그러기는 싫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뉴스에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집을 나왔다. 살기 위해서 집을 나왔다. 그것이 첫 가출이었다.
돈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얼마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저금통까지 챙겨서 집을 나왔다. 내가 집을 나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데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고, 내 다리와 심장은 떨리고, 숨쉬기가 어려웠다. 내 저금통에 있던 돈은 오만 육천칠백 원. 만 원짜리 지폐가 두 장 들어 있었는데, 그거라도 없었으면 참 암담했을 것이다. 낮에는 피시방과 공원 벤치에서, 밤에는 지하철 화장실 칸에 들어가 보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게임을 하지 않아서 피시방에 가 본 적도 없는 내가 피시방에 갔다. 하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선불 요금을 계산하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막막했다.
언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지.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나. 만약 집을 나와서 혼자 산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지. 고속도로에나 위치한 외딴 고깃집에서는 나를 써 주지 않을까?
월급도 안 받고 그냥 밥 주고 재워 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고 열심히 일하겠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씨발. 내 부모가 늘 내게 하던 말마따나 나는 재능 없고 뭐든 혼자 할 수 없는 등신 새끼였다.
나는 오만 육천칠백 원으로 이틀에 한 번 목욕탕에 갔고, 매일 삼각김밥과 라면 세 개를 사 먹었다. 투 플러스 원짜리 삼각김밥과 라면을 먹은 덕에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었다. 잠은 찜질방이나 공원에서 잤다. 단 하루도 편안하게 잠든 적이 없다. 집에서 나온 지 정확히 일주일이 되던 날 내 지갑은 바닥이 났고, 나는 공중화장실에서 물로 배를 채우며 꾸역꾸역 이틀을 더 버텼다. 죽도록 돌아가기 싫었으니까. 가출의 끝은 결국 복귀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집으로 돌아가니 부모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가출 사건' 이후 일 년 동안은 부모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내 학창 시절은 그렇게 흑백으로 어렴풋이 남아 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을 이렇게 바꾸려고 하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도 같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맞다고, 부모를 바꾸는 것보다 내가 나가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스물세 살 겨울. 나는 캐리어 하나와 크로스백 두 개를 매고 집을 떠나 나왔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그 다짐으로 말이다. 그 무렵 나는 만나던 애인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정말 미워했지만 사랑했다. 애증적 존재였다. 그녀는 내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나도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내가 가장 힘들 때 기댈 곳은 이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이 정말 비참했다. 또 이상하게도 힘들 때 기댈 곳을 떠올리면 이 사람이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도 그녀 생각이 가장 먼저 났다. 두 번째 가출은 첫 번째 가출보다 수월했다. 과정이 길고 참 복잡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만나던 애인과는 헤어졌고, 새 애인과 만난 지도 어느덧 2년이 다 되어 간다. 가끔 정말 힘든 날이면 애인보다 가족 생각이 먼저 난다.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부모 생각이 나며 괜스레 기억을 왜곡하고, 그들의 입장에 공감하며 나도 모르게 연민에 빠진다. 그렇지만 밉다. 밉지만 집 생각이 난다. 그래. 아직도 내 가출은 현재 진행형이다.
학교 앞 떡볶이집 정말 어릴 때, 그러니까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 있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집 근처 중학교 앞에는 작은 분식점이 있었다. 음식을 구매하고 노상에 깔린 테이블에 앉아 먹을 수 있는 그런 학교 앞 포장마차 분식점. 그 분식점에서는 납작만두(경상도 외 다른 지역에는 없는 음식이라고 하는데, 납작한 만두 안에 당면이 든 만두를 뜻한다)와 떡볶이, 튀김과 같은 분식을 팔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학교에서 상을 타오곤 했었다. 글쓰기 상, 그리기 상, 모범상, 등등... 다른 친구들은 상을 받으면 소원으로 '장난감'이라던가 '예쁜 인형' 같은 큰 선물을 사달라고 하던데, 내 소원은 소박하고도 단출했다. 바로 그 분식점에 떡볶이와 납작만두를 먹으러 가는 것.
"오늘은 상장 수여를 할 거예요"라는 선생님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떡볶이를 떠올렸고, 상을 받는 순간에도, 두 손에 상장을 꼭 쥐고 집으로 달려가는 순간에도 나는 떡볶이를 떠올렸다. 기대 가득 찬 마음에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빠 나 상장 받았어! 떡볶이 먹으러 가자! "라고 소리치면, 아빠께서는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꼭 잡고 분식점에 데려가 주셨다. 설레는 마음으로 분식점까지 가는 길은 참 멀게만 느껴졌다. 양파가 들어간 절임 간장이 뿌려진 따끈따끈한 납작만두와 달짝지근한 밀 떡볶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특출나게 맛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꼬챙이로 떡볶이를 열심히 집어 먹는 내 모습을 아빠께서는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아빠 손을 꼭 잡고 분식점으로 향하던 어린 나는 훌쩍 커 어른이 되었고, 이제는 사랑하는 애인과 손을 잡고 그 동네를 함께 걷곤 한다. 며칠 전, 분식점이 있던 거리를 함께 걷다가 생각난 이 추억을 애인에게 얘기하며 그때를 떠올렸다. 다정한 추억을 연인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함께'라는 시간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이었는지.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지나고 보면 또 얼마나 소중해질까. 내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 인상 깊은 추억이니 글로 한번 남겨 보면 어떻겠냐는 애인의 말에 연 글을 닫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