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의 여행 어색한 손동작이 몸에 닿자 떨림이 잦아든다. 긴장돼 있지만 절제된. 어색한 살냄새가 나를 산뜻하게 만든다. 손은 건조한 곳에서 점점 습하고 어두운 곳으로 들어간다. 부드럽게 이동하던 손길도 점점 느려진다. 손길과 다르게 숨소리는 점점 빨라지며 아무도 모를 것같은 소리가 들린다, 나만 들릴 정도로. 끈적해진 숨소리가 함께 온몸을 휘감는다. 잘못된 곳이라도 지난 것처럼.

다다


11월에 든 생각 새벽에 담배를 피우러 나가니 별이 보였다.

어떤 기회로 별이 보이는 곳에 살게 되었다. 이걸 기회라고 해야 하나, 좀 뭐하지만 내 인생에 놓이는 모든 일은 기회니까. 며칠 전 담배를 피우며 처음 별을 봤을 때가 기억난다. 그날 저녁을 잊지 못한다. 하늘을 보고 육성으로 "와..”라는 소리가 나왔다. 정말 예뻤다. 내가 우주 안에 살고 있구나, 라는 사실이 확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생각을 할 때쯤 친구가 입을 열었다. 고민을 늘어놓았다. 사람은 감상에 젖을 때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자기 연민에 빠진다. 늘 그렇듯 말하고 후회한다. 편의점 앞 진실의 의자에 앉는 순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말하게 되는 것처럼. 그 사실을 진작 깨달은 나는 내뱉는 말을 줄이고 귀를 연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스스로 만든 괴물 같은 벽을 깨야만 도약할 수 있다. 고민의 해답은 결국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며칠 전에 본 별은 참 예뻤는데. 이제 이것도 며칠 봤다고 익숙해지니까 그저 그렇네. 이상준


우연 아닌 착각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열일곱 봄. 실제로 얼굴을 본 적은 없었어도 검은 스크린 속에서 오가는 대화 속에서 그와 내가 꽤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그러한 점을 알 수 있었다. 우연인 듯 비슷한 노래를 올리고 비슷한 장소를 올리고. 그래. 지금 생각해 보면 그와 나는 미묘한 소통을 하고 있었다. 열일곱 여름 다니던 스터디 카페 옥상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눈이 참 컸다. 쌍꺼풀 없이 가로로 길고 내려진 눈꼬리 탓에 처음 본 사이지만 참 귀엽다고 느꼈다. 짙은 눈썹 큰 눈, 검정색 슈프림 티셔츠. 매미가 울기 전 애매한 초여름 밤의 공기. 몇 번을 되감아도 한 번의 꼬임 없이 그대로 상영되는 그날은 마치 영화 같았다. 여름이 지나고곧 찾아온 열일곱 가을에서 열여덟 봄까지 5개월은 될까 싶은 그 시간 동안 따돌림을 겪었던 난 매일 매일 지옥에 출근하듯 학교에 갔고 그는 억울한 일에 휘말려 생일에도 경찰서에 갔고 어느 날은 흰 꽃과 검은 옷이 있는 곳에 갔다.


오롯이 버티기엔 너무나 추웠던 열일곱 겨울에 그와 나는 서로의 온기에 의지했다. 사실 의지할 게 서로의 온기 말고는 없었다. 우리 비록 지금은 국밥집에서 청양고추 먹기 내기를 하고 조휴일과 기리보이의 노래를 들으며 주황빛 가로등 아래를 걸을 뿐이지만 겨울이 끝날 때쯤엔 바다를 가고 봄이 오면 벚꽃을 보자. 이렇게 지내다 스물이 되면 타투이스트가 되어서 피부에 그 무엇보다 값진 감정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사람이 되고 같이 지프차를 몰자는 흔하디흔한 약속을 했지만서도


참 멍청하게도 참 특별하다 이야기하며 우린 정말 특별한 줄만 알았다.

첫사랑이었으니까. 우린 어린애 장난 같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작년 즈음 전해 들었던 내 특별한 첫사랑에 대한 그의 논평은, 멍청했던 겨울 한철 사랑의 말로는, 아 걔 재미없어. 잘 맞는데, 진짜 잘 맞는데, 그래서 재미없어. 이영


도대체 사랑이 뭔지난 이제 더 이상 사랑이 뭔지 모르겠고, 사랑에 대한 정의조차 내리고 싶지 않다. 항상 친구들과 소주를 기울이면서 하는 얘기의 대부분은 여자 얘기 또는 남자 얘기.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모르는 척하고 물어보는 질문들. 그 얘기들이 모여 그날의 술자리 주제로 정해진다. 다들 알면서 왜 쉽게 정답을 꺼내지 못하는지. 그냥 그 상황이 웃기다. 헤어지면 될 것을. 더 이상 안 보면 될 것을. 더 웃긴 건 나도 그걸 이뤄내지 못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예쁘게 포장하여 얘기하고 있다는 것. 속으로는 다 까발려 무엇보다 흉한 상태로 밑바닥을 보이고 있으면서 현실에서는 무엇보다 예쁘게 포장하고 있다는 게 도대체가 우습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랑을 하기 싫다고 가벼운 사랑만을 찾는 내 모습이. 장거리여서 섹스는 할 수 있지. 익명


네가 없어도 해방촌은 그대로더라 잊은 줄 알았는데,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새벽. 2년은 생각보다 더 길었고, 생각보다 더 깊게 스며들어서.

무엇을 하든 흔적이 남아 있어서. 그냥 정말 뭘 하든 흔적이 남아 있어서 생각이 난다. 당연히 내 곁에는 네가, 네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한다고,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는데. 당연한 건 결국 없었네. 성인이 되고 다 컸다고 생각하며 시작한 사랑인데, 지나고 보는 나는 너무 어렸었네. 장기 연애한 사람 왜 만나지 말라는지 알겠다 좆도. 그래. 솔직히 졸라 보고 싶은데. 졸라 그리운데 그게 추억이 미화돼서 그런 것 같아서. 괜히 초겨울을 타는 것 같아서. 사실 돌아 가도 똑같을 것 같아서. 그 사실이 무척이나 서글프다.


어쩌다 우리는 우리를 만났고 사랑을 했을까.

왜 그렇게 깊게 빠졌던 걸까. 정말 별거 아니었는데.

왜 대체 왜 그때 헤어지지 않고 사랑했던 걸까. 정말 사랑이면 다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걸까. 그렇다고 한들 마지막에 나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사실은 진심이 아니었는데. 진심 아닌 그 말만 내뱉지 않았더라면 이런 감정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결국 끝까지 상처만 줬네. 나도 많이 받기는 했지만. 나는 그러면 안 됐었는데.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는데. 참 미안하네. 이제 볼 일도 없겠지만. 이 글은 어차피 익명으로 투고할 것이지만. 네가 이 계정을 볼 일은 전혀 없겠지만. 정말. 정말. 정말. 정말. 나는 아직 재작년 해방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1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