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깔끔하게 다운펌된 옆머리와 뒷머리. 무겁지 않게 덮은 앞머리. 오똑하게 솟은 콧대. 트지 않고 촉촉하게 관리된 입술. 아, 너무 변태 같나.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수강 신청에 실패하고 대충 주워 담은 교양에서였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누가 그래. 그의 얼굴이 낙원이었다. 개강 첫날 강의실에 들어오는 그 애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이런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24년 살며 본 얼굴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얼굴이었다.
뿔테 안경이 이리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구나, 하다가 안경 벗은 그의 모습을 본 그날. 나는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내가 그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그때부터 마음고생의 시작인 거지. 열다섯 때였나 열여섯 때였나 한창 사춘기였을 때, 일 년 넘게 홀로 짝사랑을 하며 다시는 짝사랑하지 않아야겠다 결심했는데. 그 결심이 무너져 버렸다.
아무튼 그의 모든 행동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가까워지고 싶었다. 복학을 한 걸까. 함께 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자리를 떴기에 접점을 찾기는커녕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지나갈 때면 의자를 살짝 당겨 주는 세심함, 사람들이 나갈 때 문을 살짝 잡아 주는 다정함, 늘 강의 시간보다 일찍 자리에 앉아 있는 성실함은 나를 더 빠져들게 만들고, 소설을 쓰게 만들고, 망상하게 만들고.
지독하게 엮이고 싶다는 생각과 연락처를 물어볼까 하는 생각. 아니야. 지금 물어봤다가 실패하면 종강까지 얼굴은 어떻게 들고 다니냐. 종강하는 날에 물어보자.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늘이 도운 걸까. 2인 1조로 진행하는 팀플을 그와 함께하게 되었다. 신촌 투썸에서 단둘이 만난 그는 또 새로웠다. 평소보다 향수 냄새가 진했고, 가르마를 탄 모습은, 평소보다 꾸민 그 모습은 정말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래 이건 신이 준 기회야. 부담스럽지 않게 물어보자.
"혹시 이거 끝나고 뭐 하세요?" "아, 저 여자친구 만나러 가요." 젠장. 이번 짝사랑도 망했다. 다시는 짝사랑 안 해. 으나
자주 가던 펍에 새로운 알바가 왔다. 긴 생머리에 진한 갈색 머리. 크고 매력적인 눈. 향수 향기 같은 건 나지 않았지만, 그녀를 마주할 때면 늘 은은한 향기가 나곤 했다. 출석 체크라도 하듯 여유가 나는 저녁이라면 펍에 갔다. 그러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날이면 괜히 허탈했다. 눈도장을 찍는 날이 잦아지고, 내가 가게에 들어가면 이제는 주문을 하지 않아도 늘 시키는 맥켈란 온더락을 그녀가 내어 주고, 이제는 서로의 이름을 알고, 나이를 알고, 취미를 알고, 무슨 요일에 출근하는지 알고, 서로 애인이 없다는 것도 알고.
인터넷에 몇 번이고 검색했다. 알바한테 번호 물어봐도 되나요, 손님이 번호를 물어봤어요, 알바 한테 번호 물어봤다가 까인 썰, 알바 번호 따는 법, 알바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법. 짝사랑이었다. 내게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주할 때마다 고민만 했다. 사실 그녀가 나를 '출근할 때마다 보이는 한량' 정도로 생각할까 봐 제 발 저린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사실 그녀가 출근한다던 수요일과 금요일, 토요일만 간 건데. 그리고 그녀가 늘 홀로 술을 마시던 내게 한결같이 제공해 주던 친절과 관심은 '알바생으로서 손님에게 제공하는 기본 서비스'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다가가기 두려워서 핑계와 이유를 내가 만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진짜 연락처라도 물어봐야지. 실패하면 다시는 안 가면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방문한 금요일. 그녀가 안 보였다. 그래서 사장 형에게 물어봤다.
"형. 오늘 현지 씨 출근 안 했어요?" "현지 이제 관뒀어. 야 민성아 넌 알바할 생각 없냐? 형이 너 술도 복지 차원에서 공짜로 주고 잘 챙겨 줄게." 아. 끝이구나. 사실 그날 그녀를 봤더라도 연락처를 물어봤을까. 늘 고민만 하다 실패했는데. 다음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기회가 언제까지고 제공되는 것은 아니었다. 후회해도 늦다.
그녀는 이미 떠났으니까.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살고 있을까.
새로 산 섬유유연제에서 그녀 향기가 나길래 더 생각나는 하루다. 정민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