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해 사랑했다. 보고 싶다는 말도 입에 올리지 않은 채 사랑 한다는 말을 먼저 입에 올렸다. 연애에 대해 잘 모르던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 채 사랑했다. 원래 사랑에는 순식간에 빠진다고들 하니까. 그게 맞는 건 줄 알았다.
그녀는 나와 만나기로 한 그 시점에 정리하지 못한 애인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우리 만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알게 되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맞겠지, 다 꿈일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속여도 변하는 건 없었다. 내 애인이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고 말했고,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처음 느껴 보는 사랑이라는 감정이었으니까. 가족도, 친구도 없이 자랐던 내게 그 사람은 특별한 '인연'인 줄 알았으니까.
그녀는 나를 만나기 전 다섯 번의 연애를 했다고 했다. 어쩌다 술김에 그녀가 고백했다. 섹스 파트너도 여럿 둔 적이 있고, 술에 취해 원나잇 섹스를 한 적도 몇 번 있다고. 그 뒤에 붙은 말은 또 같았다. 그녀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고 말했고, 나는 또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씨발. 낙태까지는 한 적 없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섹스할 때 그녀가 내뱉는 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나랑 하는 게 제일 좋다고, 내가 섹스를 제일 잘한다고, 하는 일종의 '섹꼴말'을 내뱉곤 했는데, 그 말을 하는 그녀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알고 있는 나는 더 이상 그런 말에 흥분되지 않았다. 한숨만 나왔다.
어느 겨울 저녁. 명동 번화가 근처에 위치한 4성급 호텔에서 우린 섹스했고, 몰려들던 좆같은 감정. 섹스하다 말고 속옷에 가운만 조여 매고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 추위도 모른 채 담배를 반 갑은 태웠나. 한참이 지나도 안 들어와서인지 그녀는 나를 찾아 나왔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는 그녀 물음에 눈물을 흘렸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 상태였다. 정말 좆같은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던 남자들을 하나하나 찾아 죽여 버리고 싶은데, 내 애인과 가벼운 만남을 즐겼던 이들을 패 죽이고 싶은데, 내가 이 사람을 왜 사랑해야 하나 싶은데, 지금 당장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이 사람밖에 없다는 점이. 그 점이 너무나 서글펐다. 내 여자의 과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건지, 세상에서 내가 버려진 기분이 들어서인지, 앞으로의 상황이 막막해서인지. 이유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오 분 정도의 침묵을 깬 건 나. 입을 열었다. 정연아. 나 심리 치료라도 받아 볼까?
그녀는 내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녀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자 불안해졌다. 그녀는 나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우리 여기까지 하자고 했지만, 나는 그녀를 떠날 수 없었다. 되레 내가 그녀에게 사과했다. 우리 헤어지지 말자고. 그게 최선이었다. 날이 밝고 상담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걸자마자 한 말은 죽고 싶어요. 나 같은 사람 한둘 본 것도 아닐 테고. 베테랑 상담사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물었다. 그런 생각이 든 이유가 뭘까요?
상담사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를 알게 되어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답은 헤어지는 것인데 헤어지지 못하는 내가 병신 같았다. 그리고 1회 8만 원짜리 이 상담이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제 지쳤나 보다. 처음에는 내가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더니. 함께 이겨내 보자더니. 나의 우울과 힘듦이 지속되니 이제는 꼴 보기 싫었나 보다. 이제 대체 본인이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더라. 그 말을 들어도 별 느낌이 없었다. 힘들 만도 하지.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청테이프를 네 개 샀다. 번개탄도 한 묶음 샀다. 물론 두 가지를 한 마트에서 사면 의심을 받을 게 뻔하니까. 마트 두 곳에 들러 구매했다. 손도 무겁고 발걸음도 무거웠다. 세 평 조금 넘는 쪽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하 씨발. 그래 그냥 죽자. 내가 죽으면 다 해결될 문제니까. 나만 사라지면 될 문제 같았다. 창틀에 청테이프를 붙였다. 공기가 새면 안 된다길래 세 번이나 덧붙였다.
죽기 전에 담배나 한 대 피우자 싶어서 생전 한 적 없는 실내 흡연을 했다.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아서 그런가. 언젠가 논산에서 체험했던 가스실과 비슷한 풍경이 연출됐다. 그리고 펼쳐지는 내 미래. 공포. 내가 죽으면 누가 슬퍼하기라도 할까.
누구는 장례식에 가족이 와서 슬피 울고, 누구는 장례식에 친구가, 누구는 제자가 와서 슬피 운다던데. 내 장례식은 누가 올지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차라리 목을 매고 죽을까. 아니야 손목을 그을까. 이틀 꼬박 밤새워 쓴 유서를 다시 읽어 보았다. 이 정도면 충분한데. 이제 죽으면 되는데.
그러면 모든 게 완벽한데. 라이터를 번개탄에 가져다 대기만 하면 되는데 왜.
또 병신 같지만 붙여 놓은 청테이프를 하나하나 뗐다. 용기도, 깡도 없는 새끼였다. 그리고 애인의 전화를 받고는 평소처럼 대했다. 이제 다 괜찮다고. 전부 극복했으니 우리 잘 만나 보자고 말했다. 이런 씨발.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나는 여전히 존나 힘들다. 고조된 감정을 욕으로 문장에 녹이는 건 표현력이 떨어져서라던데. 이게 나의 최선인가 보다. 이렇게 투고라도 하면 뭐라도 좀 나아질까.
뭘 해도 그대로인 나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바른양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