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십이월. 크리스마스 향기가 물씬 나는 밤,어지러운 마음에 쓰는 글. 시간이 용서하기를. 나는 성(性)에 늦게 눈을 뜬 것 같다. 승전한 군인의 무용담처럼 늘어놓던 친구들의 수많은 원나잇과 잠자리 이야기. 조금 부럽긴 했지만, 큰 관심이 없었다.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어쩌면 당연한 거라는 생각. 가끔 정말 외롭다거나 하루 종일 발기가 풀리지 않을 때, 시간을 적당히 들인 섬세한 자위가 나를 효과적으로 달래줄 수 있었다.
그렇게 살던 내가 대학에 입학했다. 사람을 만나 라이프스타일을 엿보고, 대화하기를 워낙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 탓에 학생회에 가입했다. 오래전부터 이미 그렇게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초록색 병, 실없는 수다, 알딸딸한 취기, 남녀가 섞여 있다는 유쾌한 흥분. 그런 것들에 홀린 듯이 이끌려 여기저기 다니다가 마침내 그녀를 만났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그게 뭐야 꼭 헌팅 멘트 같잖아요
그런가 전 성남 살다 왔어요 오 대박 저도 성남 살다 왔는데 겹친다는 것이 뭔지. 그 반가움에 맞댔던 그 손에. 비흡연자인 내게 새로 산 수박 맛 액상 향기를 맡아보라던 그 한 줌 연기에. 꽉 조여맨 컨버스 하이탑과, 젊음을 한껏 뽐내려는 블랙 롱 부츠에. 그것들에 끌려서.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그녀와 나는 안 맞았다. 한 가지 빼고. 그것은 속궁합.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섹스는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겨냈다. 연애 초반에 사랑이 넘칠 때도, 권태기가 왔을 때도, 싸운 날 화해를 할 때도. 섹스는 우리에게 일종의 언어였고, 축구와 스쿼트로 구색만 갖춘 내 하체는 고맙게도 잘 버텨줬다. 한 라운드가 끝나면 이따금 그녀는 좋아하던 끌로에 EDP를 목 뒷덜미에 세심히 뿌리며 이런 말을 했다.
어떻게 여자가 때리고 남자가 맞는 커플이 있을 수 있지?
보통은 반대잖아. 남자가 때리고, 여자가 아파하고 여기 있잖아. 자기랑 나. 사랑해. 그랬다. DNA의 유전자 염기서열이 정확히 들어맞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의 니즈를 충족했다. 언젠가 배웠던 필요충분조건. 때리고 맞고, 때리고 맞고. 서로의 성과 섹스 판타지의 민낯을 농밀하고 또는 거칠게 더듬으며, 그렇게 여름을 보냈다.
가을은 순간이다. 가을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 언제 더웠냐는 듯,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누군가가 섹스로 시작한 사랑은 이렇게나 빨리 끝날 수 있다고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더 이상 섹스만 할 수 없고, 무언가를 해야 했다. 섹스는 섹스고 현실은 현실이니까. 돈도 벌어야 했고, 공부도 해야 했다. 현실의 그림자가 옆구리를 찔렀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이 프랑스로 진격하던 것처럼. 스무 살의 어린 사랑은 시간의 시험을 이기지 못했고, 너무나 연약했다. 그 길로 나는 등을 돌리며 도망쳤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너를 그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나 봐. 이미 오래전의 얘기고, 시간도 흐를 만큼 흘렀지만, 지금도 글을 쓰면서 왠지 기억의 구석진 곳에서 끈적한 진물이 새어 나온다.
이동진의 글을 빌려 마치고 싶다.
부디 우리가 도망쳐온 모든 것에 축복이 있기를. 나를 아프게 했던 너도, 너를 아프게 했던 나도,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기를. 결국 우리가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지 않기를. 서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