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었나 토요일이었나 기억이 잘 안 난다. 친구들이 해방촌에 모였다길래 그쪽으로 넘어갔다. 며칠 만의 외출이었는지. 집에서 잘 나가진 않지만, 나갈 때는 확실하게 나가는 편이다. 모던해 보이고 싶었던 저녁이었다. 날이 추워지면 입으려고 택도 떼지 않았던 마르지엘라 엘보우 패치 가디건을 꺼내 입었다. 누군가에게 향기를 남기고 싶어서 향수도 몇 번 뿌렸다. 전애인에게 선물 받은 톰포드 퍼킹 패뷸러스. 향수 이름 같은 사랑을 하지는 못했다. 그런 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그 향수를 꺼내 뿌리곤 했다. 그날도 그런 밤이었다.


그래도 바깥에 나오니까 기분이 좋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불어오는 바람 속 느껴지는 초겨울 냄새가 좋았다. 환승하러 내린 공덕역은 그대로였고, 바로 6호선 환승하러 가면 될 것을 괜히 추억에 잠겨 2번 출구로 올라가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어차피 공덕에서 녹사평까지는 10분이면 가니까. 공덕에서 서대문까지 울면서 걸어가던 그때의 내가 보였다. 담배가 맛있었다.

언제 오냐는 친구들의 카톡에 거의 다 도착해 간다며 둘러대고는 다시 지하철을 타러 갔다.


"내렸는데 어디로 가면 됨? 해방촌 위에 있냐 아래에 있냐" "지금 어디냐면" 제발 해방촌 아래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방촌의 가파른 언덕을 오를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가면 되지만... 5분도 안 타면서 요금 1000원을 내기 싫었다.

"잠수교집 알지? 거기로 와" "아니 삼겹살 먹는다고?" "ㅇㅇ 빨리 오셈 다 기다리고 있음"


아. 언덕을 오르지 않아도 됐지만 내 준비의 흔적과 맞바꾼 거래인 것만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식당 앞에 가니 줄이 20m는 돼 보였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내 향수 향기가 옅어졌고 자리에 앉으니 향기가 다 사라졌다. 알루미늄 호일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삼겹살 때문인지 간만에 만난 친구들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시끌시끌하게 떠드는 소리, 기름 튀는 소리, 뿌연 가게 안을 보니까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이 든 김에 소주도 몇 잔 마셨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긴 머리에 아이보리색 트위드 자켓을 입고 귀걸이를 한 그녀. 그렇다고 표정이 굳어 있지는 않았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나와 비슷해 보였다. 우리 쪽 테이블 5명, 상대방 테이블 3명. 머릿수가 맞더라도 합석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눈 마주친 그녀랑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 테이블은 밥을 거의 다 먹어 갔지만, 그쪽 테이블은 아직 한참인 듯했다. 시간을 끌어야겠다 생각해 평소에 시켜 먹지도 않는 볶음밥을 시켜 먹자고 졸랐다. 식사가 나왔지만 내게 중요한 건 밥이 아니었다. 밥알을 세며 먹는 둥 마는 둥하면서도 시선은 그쪽 테이블로 가 있었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눈을 몇 번이나 마주쳤고, 마주칠 때마다 이상하리만큼 심장이 뛰었다. 연애 경험이 적은 편도 아닌데 이상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설 때 나도 급하게 일어났다. 너무 급했나. 수저를 떨어뜨렸다. 수저를 줍고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가 말을 걸었다. 함께 밥 먹던 친구 둘은 헤어진 듯 사라지고 없었다. 가게 안에 있는 내 친구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신이 내게 주는 기회인가 싶은 마음에 말을 걸었다. 혹시 친구들이랑 헤어지셨으면 간단하게 칵테일 마시러 가는 게 어때요?

옷도 예쁘게 입고 나오셨는데.

우리는 경리단길까지 걸어가며 겨울 나는 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뭘 먹어야 하고, 어딜 가야 하는지. 한겨울에는 역시 명동엘 가야 한다며, 겨울에는 핫팩이 필수라고 말하며 우리는 손을 잡았다. 빠르지만 빠르지 않았다. 더 가까워지고 싶었으니까.


오픈형 칵테일바에 앉아 돌아다니는 사람 구경을 하며 술을 마셨다. 음식은 뒷전인 날이었나 보다. 술은 뒷전이었다. 대화가 더 맛있었고 좀 취한 탓에 그녀 얼굴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키스하고 싶었다. 어쩌면 더한 것까지. 내일 아침에 약속이 있냐고 물었고, 통금 따위가 있냐고 물었다. 약속은 없고 공덕에서 자취를 한다고 했다. 공덕. 공덕에 무슨 인연이 있나. 막차가 끊기려면 멀었지만, 공덕까지 가기는 싫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하며 빠르게 에어비앤비를 켜서 근처 숙소를 예약했다. 전애인과 언젠가 기념일에 묵었던 그 숙소를. 주인장이 감각 좀 있는 사람이라 이솝 핸드워시와 조말론 핸드크림을 비치해 둔 것이 꽤 마음에 들었었던 기억이 있어서.


숙소에 들어가니 자취방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한 번밖에 안 와 봤는데 익숙했다. 겉옷은 의자에 걸어 두었고, 손과 발을 빨리 씻고 이불 안에 들어갔다. 이야기 좀 나누다 샤워하자며 이불 안으로 그녀를 꼬셨다. 우린 입을 맞췄고 그대로 키스했다. 새어 나오는 소리가 나를 흥분 시켰고, 공갈빵처럼 부풀어 있던 이불이 거슬려 침대 밑으로 떨어뜨렸다. 싸기 직전에 빼려고 하자 그녀는 피임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왜였을까. 진지하게 만나도 괜찮았을 듯한 사람이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오히려 안심됐다. 섹스가 빨라서였을까.


그날 새벽 콘돔을 끼지 않은 채 네 번이나 했다. 땀과 체액으로 젖은 시트와 헝클어진 머리를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격정적인 섹스가 끝나고서야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물어봤다. 우리는 연인처럼 행동하고 연인처럼 섹스하고 연인처럼 끌어안고 잤지만, 연인이 되지는 못했다.

가끔 만나 섹스하는 사이. 그래도 만날 때는 여전히 꾸미고 향수까지 뿌리는 그런 사이. 키스할 때마다 섞이는 그 향수 냄새가 나를 흥분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향수가 바뀐 어느 날.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정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