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 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한 너에게. 그런 우리의 끝은 좋지 못했고, 지나고 보니 뭐 하나 제대로 남은 것이 없는 듯하여 아쉽고 허망하지만, 미련과 같은 감정이 남지는 않았다는 뜻이니 차라리 잘된 일이 아닐는지.

그날따라 나는 평소에 잘 가지도 않던 동대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대문에 갔고, 회기 살던 너도 굳이 그날 동대문을 찾았다. 원래 인연이라는 것은 '우연'과 '굳이'가 겹치고 겹쳐서 생기는 것이듯 그날의 우리도 그랬다. 우리의 첫 만남 장소는 합정이 아닌 동대문이었지만, 우리가 정식적인 첫 데이트를 한 장소는 합정이었기에, 나는 가끔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 합정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사귀기 전의 남녀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기류. 표현하기 어렵지만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끔 만드는 그 분위기. 우리의 합정은 그랬다. 그날 내가 이성의 끈을 조금 더 세게 잡았더라면 전개될 2년이 다르게 흘러갔을까. 너를 미워할 생각은 없다. 다만 아쉬울 뿐이다. 너와의 연애가 끝나서 아쉽다는 말이 아니라, 너와 연애할 때의 내 행동에 아쉬움이 든다. 탓할 수 없는 법이다. 성북구글싸개


합정에서 연신내까지 벌써 2개월이 더 된 이야기다. 시월치고는 날씨가 퍽 좋아서 너와 나는 합정에서 저녁을 먹고 산책을 했다. 사실 그날 합정에 가는 것도 예정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하여, 너는 너의 꿈을 빚기 위하여, 우리는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독서실에 갔는데, 마치 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고 피시방에 가는 고등학생마냥 우리는 한 시간도 채 집중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예정되지 않은 데이트는 더욱 재밌는 법이다. 우리가 함께 합정에 간 것은 처음이라서, 나 또한 합정이라는 동네에 몇 번 가 본 적이 없어서 합정은 언제나 어색한 공간이었다. 언젠가 방문한 합정의 기억을 끄집어 보면 어렴풋이 떠오르는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에 다시 가 보고 싶었다. 기억이 왜곡되었던 것인지, 경험이 풍부해진 탓인지 다시 방문한 그 거리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환상은 오롯이 내가 만든 것이었다.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합정 방문이다 보니 식당을 정해 두었을 리가. 걷다가 끌리는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자며 걷다 보니 어느 삼겹살집이 보였고, 나이에 맞지 않게 노포집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에게 확 끌렸던 가게라 우리는 그곳에서 밥을 먹었다. 삼겹살. 삼겹살집도 그렇다. 성인이 되기 전에는 고깃집에서 고기 구워 먹는 이들이 왜 그렇게나 부러웠는지. 연인 혹은 친구들과 고깃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것이 곧 어른이 된 증표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어릴 때는 별거 아닌 것들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곤 하니까. 그랬던 내가 자라 이제는 너와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 그저 그런 식사 한 끼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큰 의미의 무언가라서. 그래서 그날도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가 계산했던 것이다.


걷자. 그래, 우리는 걸었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한 산책은 아니었다마는 합정에서 조금 걸어 나오니 익숙한 홍대입구 풍경이 펼쳐지고, 기왕 걷는 김에 조금 더 걸어 보자 싶어서 걷다 보니, 이제는 너도나도 모르는 동네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것에서 이상한 희열감이 들었다. 너도나도 처음인 공간을 우리가 함께하며 정복하는 듯한 그런 기분에서 비롯되는 희열이 아니었을는지.

걷다 보니 이름 모를 천이 보이고, 또 걷다 보니 '아, 서울에 아직 이런 곳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던 달동네가 보이고. 우리는 그곳에서 길을 한 번 잘못 들었다가 다시 올바른 길에 들고. 그렇게 걷다 보니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철길이 보이고, 마침내 도회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순간 보이는 표지. '어서 오십시오, 여기서부터 은평구입니다.' 걷다 보니 정해진 우리의 종착지는 연신내였지만, 우리는 연신내까지 가지 못하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에서 지하철을 탔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우리가 걸어서 연신내까지 갔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날 우리의 사랑이 더 깊어졌다는 것이다. 그 먼 거리를 걸으며 우리는 자취방에 도착하면 곯아떨어질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너와 나는 그날 치킨까지 시켜 먹고 잤다. 여기까지가 내가 먹고사는 추억 중 하나다. 이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