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장마의 시작. 비 내리는 소리에 잠이 깰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찝찝한 기분으로 물을 한 잔 마셨다. 늦잠이다. 그리고 확인한 휴대폰. 알림 센터 사이로 보이는 디엠 하나.

음...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을 것 같아요! 며칠 전 인스타그램을 돌아다니다 한 사람을 발견했다. 왼팔 이두에 있는 블랙 앤 그레이 타투가 매력적이라 연락했다. 그녀 인스타그램 한 줄 소개에는 '사적인 연락 x'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니까. 최대한 빨리 보고 싶어서 속 보이는 말을 좀 했지만, 그녀도 내가 싫지는 않았나 보다. 연락 나눈 지 사흘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시간 괜찮은 날 술이나 한잔 하자는 내 말에 비가 억수같이 오는 오늘 시간이 된다고 했으니까.


첫 만남 때는 최대한 깔끔하게. 그리고 섹시하게 보여야 한다. 어차피 잘지 말지는 첫 만남 때 결정되니까. 향기도 중요하고 제스쳐도 중요하다. 태생적인 알파메일 따위라면 그냥 목 다 늘어나고 속 다 비치는 흰색 반팔만 입고 나가도 여자랑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편에 속하지는 않아서. 나의 말투, 선택하는 어휘, 제스쳐를 포함하여 내가 사용하는 비언어적 표현과 언어적 표현은 모두 치열한 노력 끝에 얻어낸 산물이니. 어느 모임(여자 꼬시려고 가입한 거 아니다.)에서 친해진 형은 나를 보고는 여자에 미쳤다고 했고, 알바하다 친해진 동생은 내게 그렇게까지 발악해서라도 여자를 만나야겠냐고 했다. 그런데 나는 여자가 너무 좋은걸. 내 나름의 자기관리가 발악으로 보인다니.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해는 된다.


눅눅한 날씨가 미웠다. 머리를 말리고 세팅해도 밖에 나가 돌아다니면 금세 무너지는 헤어. 바지가 수분을 머금은 듯 괜히 축 처지는 핏. 비가 내렸지만 구두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저히 지하철을 탈 수는 없을 것 같아서 평소에는 잘 타지 않는 내 차를 끌고 나갔다. 강남에서 보기로 했다.

왜 그렇잖아. 첫 만남 때 어디서 볼지는 참 고민이다. 홍대는 애 같고, 신촌은 너무 젊다. 을지로는 자고 갈 숙소도 애매하다. 노가리 골목에서 사람들이 노가리 까는 소리를 들으며 몸을 섞을 수는 없으니까. 아무튼 강남에서 주차하기란 지옥이다. 4시간 2만 4천 원짜리 유료 주차장에 겨우 차를 처박아 놓은 뒤, 거리로 나와 검정 골프 우산을 쓰고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졸라 예뻤다. 딱 붙은 실크 원피스. 하이힐을 신어서일까. 작지 않은 키. '나 오늘 강남 가요' 대놓고 광고하는 듯한 차림. 귀가 찢어지지는 않을까 괜히 걱정하게 만드는 큰 귀걸이. 처음 보여지는 표정이 중요한데 표정 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 어차피 다 똑같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사실 디엠을 나누긴 했지만, 그건 형식적인 대화였으니까. 술을 마시며 딥해지는 대화. 그리고 눈빛. 마주칠 때마다 짓는 그녀 미소가 나를 흥분시켰다. 일단 그건 그거고. 섹스는 둘째 치고. 대화가 너무 잘 통했다. 좋았다. 끌렸다. 나도 내가 심각한 금사빠인 것을 알지만, 이별할 때마다 연애는 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다시 한번 속아 볼까 할 정도로 그 술자리는 기대 이상이었다.


강남은 막차가 끊긴 뒤부터 시작이다. 우선 나는 친구가 강남까지 데려다줬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녀는 지하철을 타고 왔다.

그럼 방을 잡을 수밖에?

하지만 막차가 끊기자마자 숙박 이야기를 꺼내면 너무 속 보인다. 술을 한 잔 더 마시기는 좀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로 했다. 이야기를 더 깊게 나누고 싶었다. 뭐 좋아하느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닭발을 좋아한다는 말 뒤에 발바닥이 아프다는 말을 덧붙였다. 다시 한번 확신의 눈빛을 받고 싶어 그녀 눈을 바라봤다. 오케이. 방을 잡아도 되겠다.


객실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급진적이었고, 콘돔도 미처 사지 못했다. 실크 원피스 속 그녀 몸이 궁금하기도 했다. 일단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객실 문을 열어젖히고 우린 꽤나 젠틀하게 상황을 진행시켰다. 급할 건 없고 밤은 기니까. 이 글은 섹스를 한 지 하루도 안 돼서 쓰고 있지만, 솔직히 섹스를 자세히 묘사할 수가 없다. 나의 능력 부족인가 보다. 시작은 젠틀했지만, 과정은 짐승 같았다.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정신없이 했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섹스 중 오갔던 말들?

체위 몇 개?

콘돔 유무 정도.


섹스가 끝났다. 그녀의 진한 미소가 한결 옅어졌다. 할 건 해서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녀 눈을 바라보며 나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지낼지 고민했다. 내일도 시간 있냐고 물어볼까?

만나자고 해볼까?

좀 더 적극적으로 나와 봐?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이름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으니까. 그녀에게 발언권을 양보했다. 그녀가 고민하다 입을 뗐다.

음... 그. 실은.. 나 남자친구 있어.

이러려고 너 만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돼서...

종종 술이나 마시자.


엘리베이터에서 복잡했던 내 머리는 복잡한 축에 속하는 것도 아니었다. 진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이 여자가 수틀려서 나를 신고하면 어떡하지? 이 여자의 남자친구는 이걸 알까?

근데 섹스 하나는 끝내 줬는데.

그럼 연락처는 주고받아야 하나?

그것보다 지금 이 여자는 다시 집으로 가려나?

대체 이 여자는 왜 나를 보러 나온 거지?

왜 애인 있다는 소리를 섹스 끝나고 하는 거지?

씨발?

그녀는 날이 밝으면 집에 간다며 내 품에 안겨 잠에 들었다. 눈을 떠 보니 그녀는 없었다. 환상이었나 싶어서 디엠 창을 확인해 보고, 정액 담긴 콘돔을 묶어서 버린 휴지통도 확인해 봤지만 전부 그대로였다. 새벽에 짐을 챙겨 나갔나 보다. 와중에 내 지갑과 시계는 그대로였다. 정말 웃기고 어이없었지만 재밌고 허무했던 나의 여름밤. 건대멋쨍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