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왜 사랑한다고 말 안 해줘?

P와 이별 후에 했던 만남에서 항상 들었던 말. 나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무겁다. 아니 무서운 건가.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뱉는 사람들이 싫다. 사랑을 말하기 전에 사랑을 마주하라-. 사랑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뭘 안다고. 사랑은 말이야 아주아주 끔찍하고 되게 좆같은 거야.

나에게 있어 사랑은 찌질함이다.

P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뭐, 우연히 마주친 동창이 성인이 되고 살이 빠지며 아주아주 예뻐졌고, 내가 반해버려서 사랑에 빠졌다는 그런 흔한 레파토리. 어차피 몇 달 뒤에 유학 가니까, 뭐. '가볍게' 만나야지 하며 시작한 연애.

가볍게...

가볍게...?

사람 마음은 마음먹은 대로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마음이 마음을 수소문하듯 이어졌고, 그 끝엔 사랑이 있었다. 그렇게 사랑은 눈처럼 내렸다. 나는 그 눈을 속절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P의 가정사와 결핍을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알코올중독자 가정폭력범 아빠와 사이비 종교에 빠진 엄마. 그것이 P의 세상이었다. 나는 P를 구하고 싶었다. 감히 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세상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녀와 일본으로 향했다. 학기 중 시간 날 때마다 P를 데리고 여행을 다녔고, 우리는 일본 전국을 다 돌았다. 유학비자가 있었던 나와 달리 P는 유학비자가 없었으니 1년에 최대 180일밖에 머무를 수 없었고, P가 없으면 죽을 것 같았던 나는 부모님 몰래 무작정 휴학을 신청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은 여자 때문에 아무 계획 없이 1년을 휴학하겠다던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감정이 격해지며 나는 집에서 쫓겨났다. 나는 순식간에 내가 누리던 모든 것을 잃었다. 가진 게 없었다. 가진 건 P 하나. 친구들 자취방을 전전하는 빈털터리. 앞서 내가 말했던가. 나에게 있어 사랑은 찌질함이다.


비가 엄청나게 내리는 새벽. 너무 보고 싶은데, 안 보면 정말 미칠 거 같은데, 택시 탈 돈이 없어서 반팔 반바지 크록스에 우산 하나 들고 5시간 동안 뛰어서 만나러 가는 것. 데이트할 곳이 없어 친구 학교 도서관에 몰래 같이 들어가 함께 앉아 웃던 것. 아, 나는 너무 찌질했다. P는 나를 사랑해서, 너무나 사랑해서. 찌질하고 돈 없던 나에게 많은 것을 해 주고 싶어서 스스로를 팔았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 사실들을 알고도 내가 그녀를 놓지 못했던 건 그녀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이 나를 너무나도 아프게 찢어놓았다만, 그것마저 내가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나는 미친듯이 울었고,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냐고 소리를 질렀고, 분에 못 이겨 스스로 내 뺨을 때렸고. 나도 울었고 P도 울었다. 그렇게 나의 정신은 병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병들자 P는 기다렸다는듯이 몇 번의 바람을 피웠다. 첫 바람 "씨발 네가 어떻게 날 두고 그럴 수가 있어"두 번째 바람 "그래도... 섹스는 안 했지? 제발... 씨발. 제발..." 세 번째 바람부터는 "아 씨발 또야?" 그렇게 꾸준히 성실하게 난 망가져 갔다. 그리고 도망쳤다. 아빠에게 빌었다. 죄송하다고, 그리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그 이후로는 사랑한다는 말이 무서웠다. 또 버림받을 거 같아서. 버림받기 싫어서. 사랑을 받기도, 사랑을 주기도 너무 버거웠다.


복학 후, 클럽에 열심히 다니며 처음 보는 여자들과 잤다. 학교에서도 내가 좋다는 여자들과 그냥 잤다. 호감을 성욕으로 치부하며 그냥 섹스했다. Tinder 속 여자를 쇼핑하듯 좌우로 넘기며 섹스를 도구로 삼았다. 혼자서는 잘 수가 없었다. 혼자서 누워있을 때면 정말 버려진 것 같아서. 결핍을 자극으로 채우려 했었다. 무언가 긴 했다. 그러나 나를 채운 것은 잘 지지 않는 끈적한 무언가. 나를 비우고 난 뒤, 나의 속에 남은 그것들의 얼룩과 찌꺼기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 이젠 깨끗한 물을 담아도 저것들에 더럽혀져 버릴 거야.


P와 헤어지고 처음으로 좋아한 여자였던 C에게 말했었다.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다 P 때문에 상처받은 거야. P 때문에.

C가 그 말을 듣고는 마음이 아프다고 그랬다. 왜? 다 P 때문이잖아. 그 애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 난 나쁘지 않아. 나는 피해자야. 계속 P가 떠오르는 건 다 내 아픔을 곱씹기 위해서야. 나는 끊임없이 나의 아픔을 곱씹어야 해 그런 게 아니면 씨발. 내가 아직 걔를 사랑하는 거 같잖아.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