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 부정 → 인정 → 이별 사랑하며, 연애하며 권태기를 겪는다는 사람들을 볼 때면 이해하지 못했다. 권태감이라는 그 책임의 소재를 당사자들에게로 돌렸다. 사랑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탓. 더 사랑했더라면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을 것.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기에, 내가 권태기를 직감한 그날은 나조차도 나의 편에 설 수 없는 우스운 입장이 되어버렸다.

무엇을 해도 설레지 않았다. 연애 초반에는 손만 잡아도 심장이 뛰곤 했었는데. 남자들은 다 공감할 것이다. 우리 처음에는 손만 잡아도 서잖아. 그런데 이제는 키스를 해도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늘 같은 데이트, 고갈된 대화 소재.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을 해소해 보려고 강아지 알러지도 참은 채 애견 카페에 가서 이색 데이트 따위를 해 보려고 했지만, 긍정적인 변화가 없었다.


그래. 4년의 연애. 이제 설레지 않을 때도 되었지.

언제까지고 불나방처럼 설레는 감정에 취해 연애할 수는 없잖아. 오히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일지도 몰라. 내가 느끼는 감정을 회피하고 부정했다. 우리는 권태기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래야만 했고, 내가 느낀 감정은 나의 착각이어야만 했다. 생각을 돌리려 찾은 한강. 벤치에 앉아 다정하게 대화하는 노부부를 보고 든 생각. 아, 내 연애는 지금 무언가 잘못되게 흘러가고 있구나. 인정하고야 말았다. 인정했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것은 내가 그토록 이해하지 못했던 권태기구나. 하지만 권태기를 인정한다고 해서 권태기가 멀리 떠나버리는 것도 아니고, 해결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니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 그만하기.


'우리 이야기 좀 하자'라는 말을 참 오랜만에 꺼냈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어서일까. 우리는 무언의 약속이라도 했던 걸까. 우리의 마지막에는 나도, 그녀도, 하늘도, 그 누구도 울지 않았다.


실망 → 감수 → 실패 → 이별 나는 생선회를 좋아하지만 당신은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나는 산울림을 좋아하지만 당신은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나는 광화문 거리를 좋아하지만 당신은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


나랑 똑같은 것들을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더랬어요 내가 아 하면 아 그리고 어 하면어 하던 사람이 있었더랬어요

...

당신도 결국엔 날 떠날 거잖아요

아무래도 난 상관이 없어요

그 사람마저도 나를 떠났잖아요

아무래도 난 괜찮아요


장기하의 「괜찮아요」 중 일부다. 그녀는 나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노래 속 주인공과 달리 나는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은 척을 했다.

그녀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남자들과 합석했다.

그것이 첫 번째 실망. 그녀 휴대폰으로 함께 릴스를 보던 중, 어느 남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뭐 하고 지내?' 물어보니 전애인이란다.

그것이 두 번째 실망. 그녀의 오른손 약지에 있던, 그녀가 패션 반지라고 했던 그 반지는 언젠가 그녀 왼손 약지에 있던 커플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세 번째 실망. 그녀는 술만 마시면 연락이 안 되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은 허울뿐인 상황 회피 술법이었던 것인가.

그것이 네 번째 실망.


음, 남자와 합석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니까. 이것이 첫 번째 감수. 전애인을 차단하지 않은 것부터 의아했지만,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을 보았으니까. 그리고 그 메시지 내용은 내가 잊으려 노력하면 되니까. 이것이 두 번째 감수. 비록 나는 폐기했지만, 나도 언젠가 전애인과 맞추었던 커플링이 있었으니까. 이것이 세 번째 감수.


술만 마시면 연락이 안 되지만, 아. 아. 아. 아니다. 감수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것들이 많다. 너무나 많아서 고통스럽다. 이건 사랑이 아니야. 더는 사랑이라고 할 수 없어. 그만하자. 나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