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포 살았던 그녀를 알게 된 계기는 헌팅. 지금은 수변공원에서 술을 마실 수 없지만, 그곳에서 술을 마시며 헌팅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그런 때가 있었다.
보통 친구끼리 오기 마련인데 혼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바다를 구경하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흥미로웠다. 에이 설마 혼자 왔겠어, 남자친구 기다리는 중이겠지 싶어서 기다려 봤다. 15분 정도 기다렸지만 그녀는 계속 혼자였다. 가만히 앉아 바다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짐을 챙겨 일어나려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혼자 오셨어요?'와 같은 진부한 멘트 말고, 직설적으로 다가갔다.
나도 혼자인데 술이나 한잔하겠냐고.
지금은 술집 거리를 돌아다니면 30초에 한 번꼴로 볼 수 있는 이자카야가 그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간단하게 술을 마시고 깔끔하게 헤어졌다. 선섹후사?
분명 섹스할 수 있었지만 섹스하지 않았다. 파트너 같은 일회성 상대로 남기기 싫은 사람이었다. 손도 잡지 않고 헤어졌다. 그렇게 다음 만남에 우린 입을 맞췄고, 진부하지만 늘 잘 먹히는 꽃 한 다발을 선물하며 고백했다. 그것이 나의 부산 애인 이야기.
업무차 서울에 갔다. 그날 거래처 사정 때문에 미팅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나왔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미팅이라 신입을 보냈던 걸까. 진행하며 쩔쩔매는 모습이 귀여웠다. 미팅이 끝나고 우리는 왕십리 곱창집에서 곱창구이에 술 한잔을 했다. 곱창을 먹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이걸 왜 돈 주고 사 먹나 싶다. 그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녀도 공감했다. 그럴 거면 다른 거 먹으러 가자고 하지 왜 곱창집에 왔냐고 물으니, 먼저 곱창 먹으러 가겠냐고 물어서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더라. 나를 만난 여자들은 곱창에 환장하던데. 아닌 경우도 있구나.
'공적으로 엮이는 이와 사적으로 엮이지 말자'가 나의 확고한 신념이었는데... 깨져버렸다. 상사 뒤치닥거리나 하는 말단 사원끼리 연민이라도 느꼈던 걸까. 맛도 없는 곱창에 둘이서 소주를 세 병이나 비웠고, 맥주는 두 병을 탈탈 털어 남은 한 방울까지 마셨다. 주량을 넘겼다. 주량을 넘긴 건 맞는데 정신은 멀쩡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방이 너무 취한 상태라 정신을 안 차릴 수가 없었다.
사랑해…우리 자고 갈래?
웅얼거리는 그녀. 일단 자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방을 잡았다. 한창 미투니 뭐니 시끄러울 때라서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내게 안기고 얼굴을 품에 비볐다. 살과 향수가 섞인 향이 내 코를 찌르는데, 그 향이 내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선섹후사?
섹스할 수 있어서 그날은 섹스했다.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좋다고 말하는 그녀 모습에 나는 더 흥분했고, 뜨거울 정도로 울리는 내 휴대폰마냥 우리 사이도 뜨거웠다. 어차피 미팅 간다고 했고, 늦게 끝날 것 같다고 했으니까. 일어난 우리는 눈을 마주치자마자 웃었다. 그 웃음에 안정감을 느꼈다. 씨발, 다행이다. 기억은 하나 보네. 고소당할 일은 없겠다.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오겠다며 애인에게 전화를 하고 왔다.
아, 어제는 미팅이 너무 늦게 끝나서. 미안하고 이야기가 길어져서 오늘 밤에야 내려갈 것 같네. 사랑해 가서 보자.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수저와 젓가락을 깔고, 물컵에 물을 따라 주며 우리는 사귀기로 했다. 순식간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왕이 된 기분이라도 느껴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에프터 케어를 해주자는 마음에 그랬던 걸까.
다시 돌아와 부산 애인. 우리가 만난 지도 200일이 넘었고, 얼떨결에 애인 부모님과 식사 자리도 가졌다.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와중에도 내 휴대폰 배경 화면은 검정색,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없음 상태가 지속되었다. 내가 만약 서울 애인에게 인스타그램이라도 한다고 말했다면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겠지만, 다행히 SNS는 일절 하지 않는다고 말했었기에. 섹스할 때는 내 옆에 누워 있는 한 사람만 생각했다. 아니다. 가끔 지난 애인들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서울과 부산. 끝과 끝 어디를 가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야릇했다. 두 사람 모두 나를 좋아하니까. 사실 서울 애인에게는 그리 큰마음이 없었다. 섹스 파트너 느낌으로 둔 사람이었지만, 그녀를 보러 휴일에 서울에 올라가곤 했다. 부산 애인에게는 미팅이 있다며 상사 욕을 잔뜩 하고선 말이다.
그 위험한 줄타기가 끝난 건 어느 겨울 새벽이었다. 서울 애인과 시청 시티뷰 오피스텔에서 함께 자던 그날 새벽. 원래 만나기 전 다른 애인의 휴대전화 저장 이름을 친한 친구 이름으로 바꿨는데, 만남에 익숙해지다 보니 긴장이 풀렸나 보다.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에 띄워진 이름은 '내 사랑 미지니'. 화장실 가려고 깬 서울 애인이 내 휴대폰을 봤고, 자고 있던 나를 깨워 상황 설명을 해 달라고 했다. 그 와중에도 든 생각은 '부산 애인에게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다.'였던 것 같다. 더 사랑하고 더 장기적으로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무슨 변명을 했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나는 한 번에 여러 명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었나. 정말 입으로 똥을 쌌던 것 같다.
다시 돌아와 부산 애인. 우리는 그렇게 삼 년을 더 만났다.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 이별 원인은 그녀의 바람. 술 마시고 연락이 두절된 그날.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내게 보이지 않게 설정해 둔 뒤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그녀, 나는 그녀 친구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고, 솔직히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한 행동을 그대로 돌려받는구나 싶었다. 그녀는 정말 미안하다며 내 앞에서 울었고, 다시는 이럴 일 없을 테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했지만, 글쎄다. 아쉽지만 나는 네토 취향이 아니라서. 나는 부산 애인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관계를 정리했다. 서울 애인과 부산 애인. 이럴 줄 알았으면 부산 애인에게 걸릴 걸 그랬나. 건대멋쨍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