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5 열이 받는다. 예은에게 그 남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대놓고 물어보면 찌질해 보일까 봐, 사랑 앞에서 자존심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아니, 그냥 여기서 고민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싫다. 찌질해 보이기 싫어서 내뱉지 못한 말을 일기에다가 쓰는 내 모습이, 이것이 나라는 인간의 최선인가 싶어서 싫어진다. 이번 사랑도 너무 성급했나. 예은이라는 사람에 대해 극히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빠져서 시작한 사랑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03.17 종훈이를 만났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스물일 적에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몇 년 만에 만난 건지 참. 그렇게 장난기 많고 천진난만하던 놈이 무미건조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하긴, 우리도 이제는 스물보다 서른에 가까워지고 있고, 어른이 되어가는 나이가 아닌 이제는 어른이라고 해도 무방한 나이라 어쩌면 그러한 종훈이의 변화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종훈이의 막역함을 기대했다. 나는 종훈이의 무한한 긍정과 천진난만한 장난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리에 나갔던 것인데, 오늘 술자리는 동화가 아닌 다큐였다. 어릴 적 함께 놀던 모두가 이제는 종훈이와 닮아 있으려나. 누군가에게는 나도 종훈이와 닮아 보일까.


03.18 아, 기분이 정말 좋지 못해서 일기를 쓰지 않으려고 했건만 언젠가 이 글을 다시 읽을 때쯤에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기를 끄적여 본다. 오늘도 빵집에서 그 남자를 봤다. 며칠 전에는 아예 창밖에서 그 남자와 예은이 대화를 나누는 것만 봤다면, 오늘은 나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서 오세요. 어?" "왜? 아는 사람이에요?" "아, 네. 여기 빵 사러 자주 오시는 분이에요." 빵 사러 자주 오시는 분. 빵 사러 자주 오는 사람. 아무리 우리가 만난 지 며칠 안 된 연인 사이라고 할지언정 그따위로 설명 가능한 사이에 불과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나는 그냥 빵 사러 오는 놈에 불과하고 남들에게 소개하기 부끄러운 애인이겠지. 나는 그대로 빵집에서 나왔다. 예은의 연락을 확인하지 않고 있다.


03.19 "그 남자 뭐 하는 사람이야?" "그냥 손님이야." "그냥 손님인데 그 사람한테 나를 애인이라고 말 못 하는 이유가 뭔데?" "애인이라고 말해 봐야 좋을 게 없잖아." "좋을 게 없다고?

그럼 숨긴다고 좋은 건 있고?"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그 사람이랑 연락하니 너?" 오늘 예은과 나누었던 대화를 복기해 보면 이렇다. 감정이 고조된 채라 약간의 신경질이 묻어났을 수는 있지만,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예은이 대화를 어떻게 마무리 지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예은은 자리를 떴다. 일전의 사랑에서 겪었던 몇몇의 일이 오버랩되면서, 아, 역시 이번 사랑도 잘못된 걸까.

벌써 지친다.


03.23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기대는 버린 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는 일마다 잘 안 풀리는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인생에 있어서 그렇다 할 계획이 있거나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었더라면 사랑이 조금 잘 풀리지 않더라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고, 사랑이 좀 잘 풀렸더라면 인생이 조금 그렇고 그렇게 흘러가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했을 터인데,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