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나도 일기라는 것을 쓴 적이 있다.

언제부터 썼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언제까지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황과의 사랑이 끝난 그날, 나는 일기 쓰기를 관두었다. 일기 쓰기란 매일매일 하지는 못하더라도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 쯤은 꾸준히 쓰며 가져온 나의 취미 활동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일기에는 황의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아니, 내 일기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해지고, 그녀와 내가 다시 웃으며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된 이상, 일기를 쓸 때마다 황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 언제부터인가 내 일기는 곧 황에 대한 관심이자 사랑과도 같았기에, 나는 그녀와의 연애가 끝난 후로 일기장을 펼친 적이 없다.


한때는 미친 듯 몰입하고 습관처럼 가져갔던 행동도 시간이 지나면 전부 흐릿해진다. 마치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딱지치기를 하지 않고, 어느 순간부터 놀이터에 모이지 않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은 굳이 억지로 꺼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떠오를 일이 없다. 나의 건강한 습관 중 하나였던 '일기 쓰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일기를 쓴 적이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가다가, 지난 주말에는 창고에서 반가운 공책 몇 권을 발견했다. 대학 시절 강의를 필기한다고 산 노트인가, 왜인지 모르게 익숙한 기분이 들어서 펼쳐 보니, 아, 나의 일기장이었다. 그녀와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일기장이, 장기 기억으로 분류되어 상기할 일도 없었던 그 일련의 추억 조각들이 하나씩 짜맞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일기에 담긴 내용을 공개하려고 한다.

언제나 그렇듯 실제 나의 인생 이야기를 담는 것이니 등장하는 인물이 곧 나의 지인인 관계로 가명으로 대체하는 경우는 있겠지만, 일기의 내용을 공개하기 남부끄럽다는 이유로 수정하거나 검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겠다. 원래 남의 일기 훔쳐보는 것이 가장 재밌다.

남의 연애사 듣는 것이 가장 재밌다. 그 두 개를 한데 모았다.


01.03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어떠한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 사랑은 여태껏 내게 어떠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저 현실적인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쳤던 도피처가 아니었나. 모든 일을 망치는 쪽은 나였다. 사실 몇몇의 연인과는 그렇게 끝낼 일이 아니었다. 나는 반드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누구 하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더 크거나 작다면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이상한 고집을 가지고 살았다. 나는 옛사랑 정과도 충분히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좋아해 준 것만큼이나 나도 그녀를 사랑해 주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그녀와 행복하게 연애를 하고 있었을까. 몇 해 전 이야기를 꺼내서 무엇 하나. 이제 사랑을 갈구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나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나도 성공적인 사랑 한번 해 보고 싶지만, 아,현실은 전쟁터와도 같아서 이제는 사치스러운 것에 감정을 소모할 시간이 없다. 유은과의 연애를 청산하고 나는 어설프고 무의미한 감정 낭비에 젖어 들지 말고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 누군가에게 존경을 살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유은이 내게 그러한 사람이었듯, 나 또한 누군가에게 이상적인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왜 그대로일까. 외로움을 타는 걸까. 내 삶에 사랑 한 줄기 내려와 나를 감싸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요 며칠 떠나질 않는다.


01.07 나는 늘 쉽게 사랑에 빠졌다. 사랑에 대한 기준치가 너무나도 낮아서 어떤 경우에는 만난 지 몇 초 만에도 상대방에게 빠져버리곤 했다. 그 감정은 아마 진정한 사랑으로서의 감정이 아닌 그저 상대방을 성적인 시각이나 하나의 수단으로 바라보았기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지만, 성적인 호감을 느끼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니 말이다. 사랑에 빠지는 속도가 남들에 비하여 빠르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직 두 달 남짓 남았다만 개강을 한다면, 나는 이제 졸업반이라고 불리는 마지막 학년이 된다. 지난 대학 생활을 회억해 본다면 부끄러웠던 순간들도 많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피와 살이 되어 나의 양분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처음 대학 왔을 때 본 선배들의 이미지와 지금 나의 모습은 괴리가 심하지만, 그래서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싶지만, 아마 갓 입학하는 새내기의 시선에는 내가 또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01.19 오늘은 그 애(아직 글에서 다룬 적이 없는 인물이다. 기회가 되면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의 생일이다. 서로의 생일을 함께 보낸 적도 없고, 사실 생일을 굳이 기억할 만큼 대단했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연락이 끊긴 지 불과 1년밖에 안 되었다는 점과 워낙 독특한 생일 일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올리고야 말았다.

그 애와 연락이 끊기던 날, 그 마지막 말은 참 의미심장했다.

"야, 너는 사랑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해? 사랑할 때면 안정감이 들어야 하는데 너랑 있을 때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야. 아직 우리는 연애하는 사이도 아닌데 말야. "나는 그 애가 말한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옛사랑과 연애할 때 느꼈던 기분을그 애는 나와 만나며 느꼈던 것이다. 나는 절대 사랑하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내가 싫어하던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랑이 뭘까. 내 사랑의 방식은 어딘가 잘못된 것일까. 며칠 전 일기에서 이따위 감상에 젖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나도 참 안 바뀐다.


01.30 벌써 일월의 끝자락에 서서 한 달을 돌이켜 본다. 영양가 없는 감상이나 철학적 고뇌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요즘에는 꽤나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대학 졸업과 취업전선이 코앞이라 부담감이 꽤 크다. 최근 NCS 공부를 시작했다. 망나니 시절과도 같았던 지난 스물의 나는 온데간데없고 그래도 이제는 나름 일인 분은 하는 사람으로 자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자퇴 원서를 낼 적에 '네까짓 게 앞가림이나 제대로 할는지...'라고 하며 혀를 차던 담임과, '뭘 해도 안 되는 등신. 그럴 거면 집을 나가라'고 했던 나의 부모는, 그들은 정말 내 인생이 망해버리기를 바랐던 것일까.


02.05 정말 아름다운 사람을 발견했다. 마주친 지 반나절이 훌쩍 넘었음에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것을 보아 아마 나의 감정은 단순 휘발성 정욕이 아예 아니었음을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 성적인 끌림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감정이 사랑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지 않는 한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사랑의 전제는 사실 성이니까, 그러한 감정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으니 말이다.

아무튼, 내 마음을 앗아간 그녀는 사거리 모퉁이 식빵 가게에서 일하는 어느 알바생이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그녀 얼굴에 홀려 가게로 들어가서는,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식빵을 일곱 개나 구매해 왔다. 우선은 그녀와 가까워질 방법을 찾는 것보다 당장 이 식빵을 어떻게 해치울지가 관건이다.


02.07 식빵집에 사흘째 방문 중이다. 사흘 동안 사 온 식빵만 열여섯 개다. 버터에도 구워 먹어 보고, 치즈란 치즈는 종류별로 다 발라서 먹어 보고, 잼도 발라 먹어 보고, 토스트도 해 먹어 봤지만, 식빵은 줄어들 생각을 않는다. 이제는 그녀도 나를 기억하는 듯했다. 오늘은 짧은 대화도 나누었다.

"식빵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식빵을 너무 좋아해서 식빵만 먹고 살아요.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대답이었다. 대화가 망했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으니 아예 망한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02.14 일주일째 빵집에 가지 않았다. 냉동실에는 아직도 식빵이 가득하다. 그녀를 몇 번이나 떠올렸는지 모른다. 서른 번?

적어도 백 번?

아니, 어쩌면 매 순간 떠올렸을는지 모른다. 생각을 마음속으로만 품는다면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내일은 다시 빵집에 찾아가 그녀를 봐야겠다.


안녕하세요 상준님. 제가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간만에 일기를 꺼내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좋은 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첫 원고를 먼저 보내드릴게요. 괜찮은 것 같다 싶으시면 나머지 원고도 보내드릴게요. 이건 진짜 제가 썼던 일기니까 뭔가 지나고 나서 추억하는 글보다 더 뜻깊고 생생하지 않을까 싶어요~ 안녕하세요, 보내 주신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여태껏 본 적 없는 독특한 전개 방식에 많은 기대가 많이 되네요. 다음 편도 보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문열 선생님의 「사색」을 읽는 듯한 느낌도 좀 들구요, 아무튼.. 실제 일기를 담는 것이니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이번 시리즈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시리즈물에 유료 메일링 서비스에, 이것저것 함께 준비해 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좋은 결과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요즘 재미를 느끼며 살아요 감사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