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새 내린 봄비에 벚꽃이 다 져버렸다. 화무십일홍이랬던가. 봄바람에 실려 나를 찾아온 것들은 여름이 채 오기도 전에 지고 말았다. 사랑은 물론이겠거니와 희망까지. 해가 죽는 시간은 점점 느려지고 나는 턴테이블 위에 올려둔 레코드판을 계절과 바꿨다.


"나는... 술 마시고 하는 거 좋아해." 웃었다. 억지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지 않으면 굳은 표정이 다 드러날 것 같아서. 입에서 나와 귀로 들어온 그 문장은 술을 더 쓰게 만들었다. 김민희 없는 홍상수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던데. 내 사랑에는 왜 늘 이처럼 감수해야 할 것들이 생기는 건가 고민했다. 평범하고 속되지 않은 사랑은 내가 향유할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인가 싶기도 했다.

왜 내가 사랑을 열면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흘러갈까라는 생각.


마카로니 과자는 세 번 리필했고, 안주로 시킨 알탕에는 콩나물만 남았다. 소주는 둘이서 다섯 병을 비웠고 담배는 혼자서 반 갑을 피웠다. 아직 애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사이지만 몸을 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들은 이야기 때문일까. 어차피 그 애와 사랑하지 못할 것 같으니 섹스라도 하고 싶어서였나. 내 마음과 그녀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것을 확신해서였을까. 가게 뒷골목에 즐비해 있는 모텔 중 이름이 가장 끌리던 곳으로 갔다. 막차가 끊겼으니까. 술 한 잔만 더 안 마셨어도 집 갈 수 있는 건데,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모텔 입구로 들어갔다.


소주 취향만큼이나 달랐다. 나는 참이슬 두 병, 그 애는 진로 한 병.

나는 천 원짜리 모텔 일회용품 세트를 사지 않지만, 그 애는 샀고. 나는 영화를 보다가 섹스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 애는 노래를 듣다가 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늘 끼고 했지만, 그 애는 안 끼는 것을 선호했고. 나는 집에서 하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그 애는 1박 3만 원짜리 CF 모텔을 좋아했다. 모텔 로고가 박힌 가운으로 갈아입은 그 애는 생각보다 더 섹시했다. 술자리에서 상상만 하던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 아까 들은 이야기 때문일까. 술기운 때문일까. 살짝 있던 몸살 기운 때문일까. 담배 때문인가. 아니, 한 달 전에는 잘만 했잖아. 긴장한 건 분명 아닌데 서질 않았다.


좆됐다. 차라리 좆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일어서고 싶을 때 일어설 수 있을 테니까. 서지 말아야 할 때는 잘만 서더니 왜 중요한 순간에서 이러는 건지. 머릿속으로 여러 상상을 했지만 그대로였다. 순탄하면 역시 이상한 게 내 인생인가 보다. 결국 그날 산 바른생각 에어핏은 한 개밖에 사용하지 못했고, 뜯은 한 개마저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버렸다.

씨발... 최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