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잊겠니 무뎌지는 거지 내가 기록한 문장들을 다시 꺼내어 마주했다. 지난 십일월 하순과 십이월 초순에 썼던 그 일기를 약 3개월 만에 꺼내 보았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인제 와 다시 보니 내용이 우습고 쪽팔리기 짝이 없어서 전부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다. 일기 한구석에 적어 둔 '우리 관계를 극복하는 법'은, 소용이 하나도 없었던 그 방법들은. 아, 부질없는 행동이었구나. 우리의 관계는 끝났다. 나는 늘 현재를 즐기기보다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불우한 미래에 더 집중하는 사람이라 그런 '해결법' 따위를 만들면서까지 우리의 관계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잊겠니 무뎌지는 거지 그날 저녁, 너와의 첫 번째 이별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관계를 지켜낼 수 있었을까에 대하여 수도 없이 생각해 봤지만, 이제 와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으니까. 나는 불안을 안고 살았고, 너는 그것에 지쳤고, 너는 나의 결핍을 채워줄 수 없었고, 나는 너를 허무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둘 버리고 '우리'보단 '나'를 지켰다. 이별이라는 결정을 내릴 당시에는 '나' 중심의 사고를 가졌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내가 피해자인 것 같다는 생각과,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는 원망, 현실 부정. 헤어진 후 연락 한 통 없는 너에게 화가 났고, 어쩌면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끝내 울리지 않는 휴대폰에 실망을 표했다. 내가 자고 있던 새벽 네 시. 일어나 확인해 보니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너의 연락이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잊겠니 무뎌지는 거지 그래, 분명 그 시간에 너는 술에 취했을 테고, 내 생각이 났을 것이고, 연락처에 내 이름을 검색한 뒤 전화를 걸었겠지. 네 전화를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너에게 있어 이제 나라는 존재는 진심을 담기에는 무겁고 취기를 빌려야 겨우 남은 미련을 토해낼 수 있는 정도인 것 같아서. 어쩌면 번호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도.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너는 취기를 빌려 쉽게, 용기 낼 필요 없이 내게 전화를 걸었겠지.
아쉽지만 나는 술김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서 그토록 바라던 너의 부재중 전화에 회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별 후 어렵게 고민을 한 뒤 너에게 연락을 하고, 너의 동네까지 찾아가 재회를 바라던 내가 우스워질 거 같아서. 받지 못한 전화를 끝으로 너는 나에게 연락하는 일이 없었고, 나도 네게 구질구질한 연락을 보내는 일이 없었다.
어떻게 잊겠니 무뎌지는 거지그 전화를 받았다면 하고 이따금씩 생각도 해봤지만, 너에게 있어서 나라는 존재는 진심을 담기에는 무겁고, 취기에 여운을 남겨 미련한 소리 하기에 좋은 관계였구나 하는 생각에 허무하기만 하더라. 이후로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를 거듭 반복했다. 할 수 있는 만큼 분노해 보고 빠질 수 있을 만큼 우울에 빠져 보았다. 반복할수록 분노는 점점 옅어져갔다. 삶의 끝과 이별은 닮아있기도 해서 끝내 마지막임을 수용하는 시한부처럼 우리도 이별을 받아들이고 완전히 수용해 낸다면, 그때는 자연스레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관계의 종말도 찾아오는 법이니 말이다.
어떻게 잊겠니 무뎌지는 거지 너에게 묻고 싶고, 해주고 싶은 얘기도 많지만, 그저 너도 나 없이 보내는 휴일이 따분했는지. 지금도 나무를 보면 내 생각이 나는지. 가끔 내가 생각나기는 하는지. 그때의 우리는 서로에게 진심이었는지.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됐다.
어떻게 잊겠니 무뎌지는 거지 내가 네게 준 상처들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무언가를 이유 없이 좋아하곤 한다는 너의 말을 믿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싶다. 용기를 내지 못한 것.
상처받기 싫어서 너에게 먼저 상처를 주던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한 것도.
전부 미안하다. 비를 정말 싫어하던 나도 너와 맞는 비는 꽤 나쁘지 않았다. 명동에서 내리던 비를 함께 맞으며 웃던 기억이 좋았다. 너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줄 마음을 갖고 싶다. 너는 계절에 감사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약속했던 첫눈은 함께 보지 못해서 아쉽지만 남은 겨울도 잘 보내라고, 덕분에 그 여름과 가을엔 꽤나 즐거웠으니 감사했다고. 너에게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