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있잖아. 나이가 들수록 무뎌진다고들 하잖아. 어릴 때는 막연하게 어른이 부러웠다.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그런 강인한 어른이 부러웠다. 나는 늘 자잘한 것들에 이리저리 치이곤 했으니까. 그래서인가. 내게 놓인 사랑에 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노력한 게 아니라 그렇게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라도 내 몫의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창 어릴 때 교복 입고 만나 그네에서 첫 키스를 나눴던 여자애와는 어떤 이유로 어떻게 이별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입시 때문이었나. 돈 때문이었나. 사 년 전에 만나 일 년 사랑한 애인과는 유머 코드가 잘 맞았다. 함께할 때 행복했지만, 그녀가 바람을 피워서 헤어졌다. 고민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 하지만 당시에는 그 누구의 어떤 조언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 정말 힘들었거든. 실은 그녀가 내 첫사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기분.
새 애인을 만들기 전, 스쳐간 자잘한 연인들. 연락 잘하다 어느 순간 잠수 타 버린 사람. 나를 좋아하니 마니 하다가 다른 남자와 술 마신 걸 걸려서 연락을 관둔 사람. 내 앞에서는 착하고 바른 척을 하다가 친구들과 전화하며 사용하는 욕설을 듣고 정이 떨어져 멀어진 사람. 그리고 또 누가 있었더라. 이름도 기억이 안 나네. 삼 년 전 만나 작년까지 사랑했던 애인과는 관심 분야가 같았다. 컨트리송에 대해 떠들고 흥얼거리다 보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랬던 그녀와 헤어졌다. 이유는 또 바람. 이번에는 내가 다른 여자랑 잤다.
어?
이상하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녀가 울면서 왜 그랬냐고,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말할 때도 아무렇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할 때 나는 덤덤하게 헤어지자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지만 전보다 힘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건가. 내가 상처를 줬으니까.
또 새 사랑을 시작했다. 또. 또. 또. 꾸역꾸역 사랑을 시작했다. 할 때가 아닌데. 여유도 마음도 없었는데. 사랑할 마음이 없었지만 풋풋한 감정이 그리웠다. 그래서 사랑했다. 또 100일 되면 작은 케이크에 촛불 꽂고 축하 노래나 부르겠지. 그리고 분위기 좋은 숙소 잡고 뒹굴거리다 섹스나 하겠지.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1주년도, 2주년도 똑같겠지. 이걸 알기 때문에 감흥이 없다. 새 사람과 새 사랑을 열었는데 설레지가 않는다. 설레긴 했지. 딱 1주일?
어차피 헤어질 건데 뭐 하러 최선을 다해 사랑하냐. 사랑 그거 다 똑같잖아?
감정이 고장 난 것 같다. 사랑에 늘 진심이었던 내가 사랑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사랑을 그만해야 하나. 첫 자위는 짜릿하지만, 가면 갈수록 의무적으로 하게 되듯. 사랑에 너무 익숙해졌나. 풍요 속 빈곤일까. 사랑도 중독인가. 어릴 때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막연히 어른이 부러웠는데. 이제 어른 그만하고 싶다. 다시 아무것도 몰랐던 순수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사소한 것에 설레고 사소한 것에 웃고 싶다. 그렇다. 지친달팽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