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과 3년을 사귀었다.
누구나 꿈꾸는 연애 아닌가. 많이 사랑했고 행복했다. 첫사랑과 결혼하는 그런 영화 같은 일이 내게 벌어 지나 싶었지만, 어림도 없지.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가 자취방에 직장 동료를 들였거든. 어쨌든 그렇게 길었던 연애는 끝이 났다. 그녀가 먼저 내 연락처를 차단했다. 아니, 차단은 해도 내가 해야 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할 때쯤, 다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겠구나, 생각할 때쯤 익숙한 번호로 전화가 왔다.
준서야. 잘 지내?
응 나 잘 지내지, 너는?
나 요즘 운동도 일도 열심히 해, 멋진 사람 되려고.
잘됐네. 여자친구는 생겼어?
아니 당분간은 연애 안 하려고 그래도 여자 좀 만나고 그래. 나는 남자친구가 생겼어.
그렇구나. 잘됐네. 네가 선택한 사람이면 좋은 사람일 거야.
응, 좋은 사람이야. 나한테 잘해줘.
새벽 한 시. 두 시간 남짓의 '뭐 어쩌라는 거지' 식의 전화에서 우리는 되게 다양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대화는 저게 끝이다. 그날 전화에서 말했던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 나랑 사귈 때 자취방에서 뒹굴었던 직장 동료라고. 괘씸해서 대화가 기억에 남았나 보다. 나는 그녀와의 이별이 이상하리만큼 슬프지 않았다. 상실감보단 해방감이 더 컸던 것 같다. 전화를 끊자마자 Tinder를 깔았다. 오랜 연애에 대한 보상 심리였을까?
여자를 많이 만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많은 여자와 자고 싶었다. 자고 싶은 여자가 생기면 채팅을 하고 약속을 잡고 술을 마시고, 그러다 섹스도 하고. 그렇게 인스타그램 팔로잉 목록에는 여자친구라고 하기도 애매한, 여사친이라 하기도 애매한 여자들이 서너 명 정도 생겼다. 파트너였던 거지 뭐.
아무튼 그 누구보다 열심히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 미용하고 피부 하얗던 K. 키 크고 얼굴이 작던 패디과 Y. '나 사업하는 여자야' 라고 말하며 늘 밥을 사던 J. A도 그렇게 만났다. 그녀와의 첫 약속도 나머지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술이었다. 약속 장소를 헤매고 있었는데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인기척이 느껴진 장소로 발길을 옮기자 차 트렁크 뒤편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A였다.
그러면 안 보일 거라 생각했는지.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귀여웠다.
뭐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칵테일을 좋아한다는 그녀와 펍에 갔다. 취하고 싶었는데 취하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그렇게 칵테일을 대여섯 잔 정도 마셨나. 야. 누가 칵테일을 이렇게 마셔~ 술맛도 안 나는데 뭘.
그리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텔에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여자 많이 꼬셨냐는 그녀의 말에 나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그녀에게 가벼워 보이기 싫었다. 그날 이후, 나는 쉬는 날마다 A를 보러 갔다. 우리는 그림도 그렸고 책도 읽었고, 다른 여느 커플들처럼 커피 마시고 술도 마셨다. 섹스도 하는 그런 사이. 그녀 자취방에서 중경삼림을 봤던 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영화가 재미없다고 노트북을 닫았다. A는 금성무를 보고 있었고 나는 A를 보고 있었다. 질투가 났던 걸까. 그날은 그녀를 껴안고 몇십분 동안 키스만 했던 것 같다.
너는 연애 안 해?
지금은 좀 바빠서. 나도 곧 복학해야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좋아한다고 말할걸. 괜히 마주할 끝이 두려워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다. 그러다 나는 경상도에서 경기도로 주소지를 이전했고, 자연스레 그녀와의 연락은 줄어들었다. 그녀와 나는 언제 우리가 몸을 나눴냐는듯이 멀어졌다. 시간이 좀 흐른 어느 여름. 그녀의 자취방 근처 술집에서 치킨과 함께 맥주를 마셨다.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던 사이에서 자취방에 들어 가지 못할 사이가 된 우리. 얼굴이 적당히 붉어질 만큼 기분 좋게 마시고 바깥 벤치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데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야. 나 그때 너 좋아했는데 알고 있었냐?
아니 몰랐어. 너나 좋아했어?
응 근데 너는 나랑 섹스만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너랑 안 잤던 거야.
그래 맞다. 어느 날부터 그녀는 나에게 귀엽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나의 계정을 인스타그램에 태그하기 시작했으며, 어느 날부터 나의 일상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의 섹스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나는 쭉 무시해 왔다. 가볍게 시작한 만남이라 그런가, 끝도 가벼울 줄 알았거든.
이래서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하나 봐. 그녀가 나지막이 얘기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던 그녀 얼굴은 이때까지 봤던 표정 중에 제일 슬퍼 보였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섹스를 했던 날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키스를 했던 날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손을 잡았던 날보다. 갑자기 술 마시기가 싫어졌다. 그녀도 그런 것 같았다. 괜히 쿨해 보이고 싶었었나. 깔끔하게 끝내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이거 계산은 내가 할게. 나 때문에 돈 많이 썼잖아. 안녕 잘 지내.
그래. 너도 잘 지내.
나는 아직도 왕가위 감독 영화를 볼 때면 그녀 생각이 난다. 중경삼림은 왕페이가 정말 매력적인 것 같아. 웃을 때 너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오늘은 타락천사를 봤는데 금성무가 진짜 잘생기긴 했더라. 첫 만남 때 네가 나를 보고 뜬금없이 홍콩 사람같이 생겼다고 했었는데 잘생겼단 뜻이었겠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가끔은 이렇게 네 생각에 잠겨. 가벼운 만남에 너무 마음을 쓴 내 잘못일까. 나도 모르게 너를 사랑했던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