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말이야. 포도. 나는 늘 씨가 있는 포도만 먹다가 처음으로 거봉이라는 것을 먹어 봤다. 씨가 없다는 편리함과 일반 포도보다 달콤한 그 매력에 반해서 포도알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다가 목에 걸린 뒤로 포도를 한 18년 동안 먹지 않았다.


어느 날 만난 너는 포도를 좋아했다. 왜, 남녀가 처음 만나면 당연하다는 듯 하는 호구조사. 무슨 노래를 좋아하냐느니, 어떤 계절을 좋아하느냐, 뭐 그런 거.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는 나의 물음에 너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포도라고 말했다. 당연히 떡볶이라든가 아니면 파스타라든가, 하다못해 달콤한 망고 빙수와 같은 음식이 나올 줄 알았는데, 네 대답은 포도였다.


엉뚱한 매력에 나는 웃음을 지었고, 그런 나를 보며 너는 포도를 생각하니 침이 고인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네 미소 덕분에 나의 '포도 트라우마'는 자연스럽게 잊혔다.


너는 포도를 정말 좋아했다. 그해 우리는 포도를 질리게 먹었다. 그때만 해도 ‘샤인머스캣’과 같은 개량된 포도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너와 나는 마트에 파는 ‘적포도’라든가 ‘청포도’를 먹었다. 대학생다운 뻔한 데이트를 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대학가에 사는 배고픈 학생들을 위한 집 앞 24시 마트에 들러 포도를 두 송이 사서 들어갔다. 우리만큼 건강한 야식을 먹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과일은 살도 안 찐다는 실없는 소리에 웃으며 포도를 먹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포도를 먹었고, 포도를 먹고 키스를 했고, 포도를 먹고 잠을 잤고, 데이트가 끝나면 포도를 먹었다. 너는 늘 씨를 삼켰고, 나는 늘 씨를 뱉었다. 그런 너를 보고 ‘씨를 삼키면 배에서 포도가 자란다’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면, 너는 웃으며 ‘그 말이 사실이면 이미 내 뱃속에는 포도 농장이 있을걸?’이라고 받아쳤다.


너는 늘 문제를 뱉었고, 나는 늘 삼켰다. 너는 언제나 포도를 삼키듯 빨리 먹었고, 나는 트라우마 때문에 포도를 꼭꼭 씹어 먹었다. 우리가 다툰 날에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포도는 먹었는데, 그런 날이면 나는 포도씨까지 꼭꼭 씹어 먹으며 다시 무언가를 삼켰다. 그렇게라도 해서 감정을 삭이고 또 숨기고 싶었으니까.


그래. 너와의 사랑은 참 소박했다. 너는 포도 한 송이에 웃었고, 포도 한 송이에 기뻐할 줄 알았다. 포도 한 송이에. 그러니까 말이다. 너는 포도를 너무 좋아했다. 살면서 포도를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을 아직까지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포도를 볼 때마다 네 생각이 난다. 그래서 밉다. 너는 포도를 대체 왜 그렇게나 좋아했는지, 그리고 나와 함께 왜 그렇게 많은 포도를 먹었는지.


늘 이맘때만 되면 코끝에 포도 향기가 스치고 지나간다. 포도 철도 아닌데 웃기지. 늘 그런 느낌만 받다가 며칠 전에는 ‘진짜’ 포도 향기가 내 코를 확 스치고 지나갔다. 너와 먹던 그 진한 머루 포도 향기가 났다. 출처를 알 수는 없었다. 포도 철이 아니니 실제 포도는 아니었을 것이고, 그 향기는 지나가는 사람의 전자담배 향기에 불과한 것일지 아니면 나의 상상이 만들어낸 환상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너는 올해도 포도를 먹겠지. 나는 너와 갈라서고 포도를 먹지 못한다. 아무래도 혼자 포도를 먹는 불안해서. 다른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전애인에게 전화한다는데, 나는 포도에 취해 너에게 연락할까 . 괜히 네가 떠올라서 포도를 먹지 못한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샤인머스캣이 한창 유행이라고 난리였을 , 누군가 어렵게 구했다며 내게 송이를 선물해 줘서 먹어 봤지만 너와 먹던 포도보다 못하더라. 나는 아직 포도를 먹지 못한다. 나는 포도가 정말 밉다.